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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완벽에 가까운 투수를 꼽으라면, 대부분의 야구 팬들은 망설임 없이 한 이름을 댑니다. 선동열. 제가 처음 그의 투구 영상을 본 건 꽤 오래된 일인데, 타자가 손도 못 대고 돌아서는 장면을 보며 '이게 정말 같은 야구 맞나' 싶었습니다. 평균자책점(ERA)이 0점대라는 숫자는 지금도 믿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그토록 완벽했던 선수가 지도자로서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다는 점입니다.

선수시절 : 숫자로 증명한 불멸의 기록
흔히 투수의 실력은 탈삼진 수로 판단한다고들 하는데, 제 경험상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탈삼진을 많이 잡아도 볼넷을 남발하거나 피홈런이 많으면 결국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 관점에서 선동열이라는 투수는 정말 이례적이었습니다. 구위, 제구, 완투 능력 세 가지를 동시에 갖춘 투수는 KBO 역사 전체를 통틀어 찾기 어렵습니다.
선동열은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첫 시즌부터 평균자책점(ERA) 1.70으로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여기서 ERA란 투수가 9이닝 동안 허용하는 평균 자책 실점 수를 의미하며, 수치가 낮을수록 더 뛰어난 투수입니다. 통상 2점대면 에이스급으로 평가받는데, 선동열은 데뷔 첫해부터 그 기준을 가뿐히 뛰어넘었습니다.
이듬해인 1986년은 말 그대로 역사가 쓰인 시즌이었습니다. 260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19완투·8완봉을 기록하고,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0점대 ERA를 달성한 것입니다. 완봉(完封)이란 선발 투수가 실점 없이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마무리하는 것으로, 그 해 완봉 8회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단일 시즌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이 수치를 처음 확인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현대 야구에서 선발 투수가 시즌 전체에서 완봉을 한두 번 하면 뉴스가 될 정도인데, 8번이라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최고 구속은 155km/h에 달했고, 130km/h대의 예리한 종방향 변화를 그리는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삼았습니다. 쓰리쿼터 투구폼(팔이 어깨와 수평보다 약간 낮은 각도로 공을 던지는 방식)에서 나오는 공은 타자 입장에서 가슴 쪽에서 갑자기 날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당시 선수들이 증언했습니다. 1991년에는 KBO 최초의 억대 연봉 선수가 되었으며, 7시즌 연속 ERA 타이틀을 차지하는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출처: KBO 공식 홈페이지
1995년 선동열은 한국에서 더 높은 무대를 향한 도전을 선언했습니다. 주니치 드래곤즈와 3억엔 2년 계약을 체결했는데, 첫 시즌은 처참했습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인한 멘탈 붕괴, 그리고 투구 메커니즘의 문제가 겹치며 기존에 보여주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러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3,000개의 공을 던지며 투구폼을 간결하게 고쳤고, 체인지업과 투심 패스트볼(직구와 비슷한 속도로 날아오다 타자 앞에서 약간 움직이는 구종)을 추가해 구종 레퍼토리를 넓혔습니다. 1997년 복귀 시즌에 38세이브, ERA 1.28을 기록하며 센트럴리그 최고의 마무리로 도약했습니다. 박수칠 때 떠난다는 소신대로 1999년 팀의 리그 우승 후 천문학적인 재계약 제안을 뿌리치고 은퇴를 선언한 것도 제가 인상 깊게 본 부분입니다.
- 1986년 한국프로야구 최초 단일 시즌 0점대 평균자책점 달성
- 7시즌 연속 ERA 타이틀 — KBO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
- 단일 시즌 완봉승 8회 — 현재까지 깨지지 않는 최고 기록
- 1991년 KBO 최초 억대 연봉 선수 등극
- 1986~1989년 해태 타이거즈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 주도
KBO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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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라이벌 : 세 번의 맞대결이 남긴 전설
라이벌 관계가 선수를 더 크게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선동열과 최동원의 맞대결을 보면 그 확신이 더 강해집니다. 단순히 두 투수가 같은 날 마운드에 올랐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으니까요.
최동원은 선동열보다 5년 선배로, 프로 출범 초창기부터 리그를 지배한 투수였습니다.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이자 선동열이 프로 진입 전부터 목표로 삼았던 존재였습니다. 그 우상과 처음으로 선발 맞대결을 펼친 것이 1986년 4월 19일이었고, 제가 여러 기록을 찾아보면서 이 경기가 단순한 승부 이상이었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당시 최동원은 전 시즌부터 12연승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프로 2년 차의 선동열이 6피안타 완봉승으로 그 연승을 끊어냈습니다.
두 번째 맞대결인 1986년 8월에는 최동원이 9이닝 완봉승으로 설욕하며 1대1 동률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1987년 5월 16일, 세 번째 대결이 열렸습니다. 제 경험상 스포츠에서 세 번째 맞대결은 늘 특별한 무게를 가지는데, 이 경기는 그 기대를 훨씬 초과했습니다. 양 팀 타선이 팽팽히 맞선 끝에 연장전에 돌입했고, 선동열은 15회까지 완투하며 무려 232개의 공을 던졌습니다. 피안타 7개, 탈삼진 10개, 56명의 타자를 상대한 이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지만, 결과보다 그 내용이 더 오래 기억됩니다.
투구수(pitch count)란 투수가 한 경기에서 던진 공의 총 개수를 말하며, 현대 야구에서는 100개를 넘기면 교체를 검토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232개는 현재 기준으로 보면 상식 밖의 수치로, 이 한 경기만으로도 수술대에 오를 수 있는 수준의 투구량이었습니다. 경기 후 최동원이 선동열의 손을 잡으며 "동열아, 우리 끝날 때까지 한번 던져볼까"라고 묻자 "형님, 한번 해볼까요"라고 웃으며 답했다는 일화는, 두 사람이 단순한 라이벌을 넘어 서로를 인정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출처: 스포탈코리아
일반적으로 라이벌 관계는 경쟁심과 적의로만 이뤄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보면서 느낀 건 달랐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 올린 관계, 그것이 선동열과 최동원 사이였습니다.
감독 평가 : 성적과 감정 사이의 간극
성적이 좋으면 좋은 감독이라는 말이 야구판에선 당연하게 통용됩니다. 저도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는데, 선동열 감독 사례를 들여다보면서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선동열 감독은 삼성 라이온즈 지휘봉을 잡은 시절 한국시리즈 2회 우승과 1회 준우승을 기록했습니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는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내기도 했으니, 수치만 보면 결코 실패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오승환, 최형우, 박석민 같은 선수들을 발굴해 주전으로 세운 세대 교체의 공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팬덤의 온도는 달랐습니다. 삼성 팬들이 오랫동안 사랑한 팀의 정체성은 공격적이고 화끈한 타격야구였는데, 선동열 감독의 '지키는 야구' 스타일은 그 감성과 맞지 않았습니다. 더 결정적이었던 건 양준혁 홀대 논란이었습니다. 프랜차이즈 스타(한 구단에서만 오랜 시간 뛰며 팀의 상징이 된 선수를 의미합니다)에 대한 대우가 부족하다는 인식은 팬들의 감정을 돌아서게 만들었고, 결국 성적에도 불구하고 지지를 잃었습니다.
이후 친정 팀 기아 타이거즈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기대는 뜨거웠지만, 포스트시즌 진출 한 번 없이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이종범 은퇴 종용 논란, 최희섭 홀대 논란 등이 삼성 시절과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면서, 이건 개별적인 실수가 아니라 리더십 스타일 자체의 문제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류의 논란이 반복될 때, 대부분은 우연이 아닙니다.
결국 선동열 감독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결과는 냈지만 과정에서 사람을 잃었다. 선수로서 쌓은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 그 반작용으로 지도자에 대한 실망이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선동열 선수의 평균자책점 기록이 진짜 0점대인가요?
A. 맞습니다. 선동열은 1986년 KBO 역사상 최초로 단일 시즌 0점대 ERA를 달성했습니다. 일반적으로 2점대면 에이스급이라 평가받는 기준에서 보면 0점대는 사실상 다른 차원의 수치입니다. 이후에도 7시즌 연속 ERA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Q. 선동열 vs 최동원 맞대결은 몇 번이나 있었나요?
A. 선발 맞대결은 총 세 차례였습니다. 1986년 4월 선동열 완봉승, 1986년 8월 최동원 완봉승, 1987년 5월 232구 15회 무승부로 1승 1무 1패를 기록했습니다. 구원 등판까지 포함하면 두 번이 더 있지만, 선발 맞대결만 놓고 보면 사실상 완벽한 균형으로 끝난 셈입니다.
Q. 선동열 감독은 왜 삼성에서 우승을 했는데도 팬들에게 비판을 받았나요?
A. 성적과 팬 감정은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삼성 팬들은 오랜 시간 공격적인 타격야구를 팀의 정체성으로 사랑해 왔는데, 선동열 감독의 수비 중심 야구가 그 정체성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양준혁 홀대 논란처럼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대우 문제가 겹치면서, 결과보다 과정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평가가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Q. 선동열이 일본 주니치에서 처음에 부진했던 이유가 뭔가요?
A. 스프링 캠프 도중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별세라는 정신적 충격이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여기에 와인드업 동작이 커서 주자 도루에 취약하다는 피칭 메커니즘 문제와, 직구·슬라이더 두 구종에만 의존하는 단조로움이 일본 타자들에게 빠르게 분석당한 것도 원인이었습니다. 이후 하루 3,000개의 투구 훈련으로 폼을 교정하고 구종을 추가해 1997년 극적인 부활을 이뤄냈습니다.
결론
1980년대 광주 무등경기장, 마운드 위의 선동열은 '무등산 폭격기'로 불렸습니다. 그 별명이 어색하지 않았던 건 단순히 구속이 빨라서가 아니라, 타자가 공략할 틈 자체를 주지 않는 완성도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그의 기록들을 직접 들여다보면서 느낀 건, 이건 재능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상 후 재기, 일본에서의 추락과 부활, 그리고 정점에서 스스로 물러난 마무리까지, 그 모든 과정이 하나의 커리어를 만들었습니다.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복잡합니다. 성적은 있었지만 사람을 얻지 못했고, 같은 논란이 반복되면서 리더십 자체에 의문표가 생겼습니다. 선수 선동열에 대한 경외와 감독 선동열에 대한 아쉬움이 한 이름 안에 공존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가장 솔직한 평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야구사에 관심이 있다면, 1987년 5월 16일 경기 영상을 한번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232구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 눈으로 확인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