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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투수 최동원 (경부선 야구, 1984 한국시리즈, 선수협)

nadia0100 2026. 10. 12. 08:00

목차


    1984년 한국시리즈, 최동원은 열흘 동안 다섯 경기에 올라 610개의 공을 던지고 혼자 4승을 따냈습니다. 이 기록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숫자를 두 번 다시 읽었습니다. 혹시 오타가 아닌가 해서요. 그런데 오타가 아니었고, 더 알면 알수록 이 사람의 삶 전체가 그 열흘처럼 살아졌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최동원 선수

    경부선 위를 달린 야구 인생

    최동원의 커리어를 지도 위에 펼쳐 보면 묘하게도 경부선 라인을 따라 움직입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고, 연세대 시절엔 서울에서 대통령기 중결승전 18이닝 무실점이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대전에서는 선수협을 창설했고, 경상도 라이벌 구단인 대구의 삼성으로 강제 트레이드당했습니다. 은퇴 후엔 다시 서울에서 해설위원으로, 대전에서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로 활동했습니다. 제가 이 동선을 처음 정리해봤을 때 이 사람이 한 도시에 머물러 편하게 살기를 거부한 사람이었구나 싶었습니다.

    그의 야구 출발점은 의외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45kg이었던 소년이 체중을 줄이려고 스포츠를 시작했고, 그 중 야구를 택했습니다. 경남고 진학 이후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는데, 1975년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노히트 노런이란 상대 타자들에게 안타를 단 한 개도 허용하지 않고 0점으로 막아낸 완벽한 경기를 뜻합니다.

    1976년 청룡기 대회는 사실상 최동원 혼자 치른 대회였습니다. 4강전에서 11개의 탈삼진 완봉, 승자 결승에서 20K, 최종 결승전 완승. 이 연속 등판을 소화하면서도 구위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훗날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김시진은 "최동원의 최전성기는 고교 시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칭찬인지 아니면 그 이후의 혹사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아직도 양쪽으로 읽힙니다.

    • 1975년: 경북고 상대 노히트 노런으로 전국 주목
    • 1976년: 청룡기 4강~결승 연속 등판, 사실상 원맨쇼
    • 1978년: 대통령기 이틀에 걸쳐 18이닝 무실점, 다음 날 결승 완투
    • 1978~1981년: 로마 세계야구선수권, 대륙간컵 등 국제무대 활약
    요약: 최동원의 커리어는 경부선 노선을 따라 움직였고, 그 동선 하나하나가 자신을 내던진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1984 한국시리즈가 남긴 것

    1984년 정규 시즌 성적만 봐도 이미 압도적이었습니다. 51경기에 등판해 27승, 284.2이닝 소화, 탈삼진 223개로 타이틀을 가져갔습니다. 당연히 투수 골든글러브와 정규 시즌 MVP는 그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시즌의 진면목은 한국시리즈에 있었습니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전기리그 우승팀으로서 상대 선택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의도적으로 경기를 내주며 롯데가 한국시리즈에 올라오도록 유도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회자됩니다. 롯데 선수단 입장에서는 자존심 문제였고, 그 총대를 에이스인 최동원이 멜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경험상 스포츠에서 자존심이 걸리면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짓을 합니다.

    1차전 138구 완봉, 3차전 12K 완투승, 5차전 완투패, 6차전 구원 등판 후 7차전 선발 등판. 7차전에서는 이미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 나가 테이핑을 감고 던졌습니다. 8회 유두열의 역전 홈런이 터지자 거짓말처럼 구속을 회복해 경기를 마무리했습니다. 열흘간 610개의 공, 40이닝, 4승. 이 숫자는 개인 기록이 아니라 팀 하나를 어깨에 얹고 버텼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 시리즈의 MVP는 최동원이 아닌 7차전 결승 홈런의 주인공 유두열에게 돌아갔습니다. 투수의 혹사가 당연시되던 시대였다는 씁쓸한 방증이기도 하고, 골든글러브와 정규 시즌 MVP가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상을 분배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두 가지 모두 사실이었을 거라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최동원이 받아야 할 무언가가 그에게 닿지 않았다는 점은 같습니다.

    그의 구위를 뒷받침한 기술적 요소는 분명했습니다. 직구 최고 구속은 공인 기록 기준 145km였으나, 진짜 위력은 RPM(회전수)에 있었습니다. RPM이란 공이 1분에 몇 번 회전하는지를 나타내는 수치로, 높을수록 공이 가라앉지 않고 타자 눈앞에서 떠오르는 듯한 궤적을 그립니다. 여기에 12시에서 6시 방향으로 수직 낙차가 큰 드롭성 커브를 동일한 투구폼에서 던졌습니다. 동일한 폼에서 구속 조절까지 자유자재였으니, 타자들은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실제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홈런을 맞으면 다음 타석에 똑같은 코스에 다시 던졌다. 칠 테면 쳐봐라." 이 배짱이 그를 단순한 파워 투수가 아닌 언터처블로 만들었습니다.

    요약: 1984년 한국시리즈는 최동원 혼자 4승을 따낸 전인미답의 무대였고, 그 과정은 시대가 에이스에게 강요한 헌신의 극단이었습니다.

     

    선수협과 그 이후, 진짜 투사의 모습

    최동원이 선수협 결성을 주도한 것은 1988년이었습니다. 계기 중 하나는 해태 타이거즈 소속 김대현 선수가 원정 이동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음에도 구단이 유가족에게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주 뒤, 선수 142명이 대전 유성 호텔에 모여 창립 총회를 열었고 최동원이 초대 회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사실 내 생각만 한다면 선수회를 만들 일은 없다. 어려운 동료, 부한 후배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나 같이 연봉을 많이 받고 여유 있는 선수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저는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때 당시 리그 최정상 선수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이 침묵이었다는 걸 알기에 더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결과는 가혹했습니다. KBO의 제재로 선수협은 곧바로 해산 수순을 밟았고, 구단들은 참가 선수들과 재계약을 거부한다는 의사를 내놓았습니다. 최동원은 보복성 트레이드로 삼성에 강제 이적당했습니다. 전성기가 지난 몸으로 낯선 유니폼을 입어야 했고, 이후 역대 최초의 통산 183승을 끝으로 실질적인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은퇴식도 없이 조용히 마운드를 떠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임종을 진심으로 기린 구단은 롯데도 삼성도 아닌 한화였습니다. 대전에서 코치로 일하며 마지막 야구 인생을 보낸 곳이 한화였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사람을 가장 진하게 기억하는 건 그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고마움을 느낀 쪽입니다.

    2006년 한화 투수코치 시절, 그는 스프링 캠프에서 고졸 신인 한 명을 눈여겨 보고 감독에게 "이 선수는 반드시 선발로 써야 한다"고 어필했습니다. 그 신인이 데뷔 시즌에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수상한 류현진입니다. 류현진은 최동원 별세 직후 인터뷰에서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영웅이다"라고 했습니다. 선수협 결성이라는 씨앗은 훗날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설립의 발판이 되었고(출처: KBO 공식 사이트), 그의 투쟁이 없었다면 현재 선수들이 누리는 최소한의 권리도 훨씬 늦게 자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롯데 자이언츠는 그의 사후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출처: 롯데 자이언츠 공식 사이트). 2011년 9월 14일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3개월 뒤 영화 퍼펙트 게임이 개봉해 선동열과의 1987년 맞대결을 스크린에 올렸습니다. 그 명승부에서도 최동원은 연장 15회를 던진 뒤 3일 간격으로 완투승 세 경기를 연속 소화했습니다. "알았다 마, 함 해보자"라는 한 마디로 압축되는 노피어 정신, 동기들조차 "저 사람은 보통 인간의 범주가 아니야"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입니다.

    요약: 최동원은 마운드 위의 혹사를 묵묵히 감내했을 뿐 아니라, 제도 밖의 싸움에서도 가장 앞줄에 섰던 투사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최동원 선수가 1984 한국시리즈 MVP를 못 받은 이유가 뭔가요?

    A. 공식 발표된 이유는 없지만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합니다. 정규 시즌 MVP와 골든글러브를 이미 최동원이 가져간 상황에서 상을 분배했다는 설이 있고, 당시 투수의 혹사와 기여도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시대적 한계였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두 가지가 동시에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그 시리즈에서 최동원의 기여가 유두열보다 작았다고 보는 사람은 지금 거의 없습니다.

     

    Q. 최동원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못 간 이유가 뭔가요?

    A.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정식 계약을 제안했지만, 병역 특례 시행령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당시 특례 수혜자는 5년간 지정 근무지인 국내 구단에서 종사해야 했고, 이를 어기면 혜택 자체가 박탈됐습니다. 정부가 프로야구 흥행을 위해 국내 최고 선수의 해외 진출을 막은 셈이었습니다. 차범근 같은 축구 영웅조차 만기 제대 후에야 해외에 나갈 수 있던 시절이었으니, 시대의 벽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Q. 최동원 선수협은 왜 실패했나요?

    A.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에 절차를 밟지 못했고, KBO로부터 정식 노조가 아니라는 지적을 받으며 징계 수순을 밟았습니다. 구단들은 참가 선수들과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놓았고 최동원은 삼성으로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실패였지만, 이 사건이 훗날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설립의 씨앗이 됐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론 성공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Q. 최동원과 선동열 중 누가 더 위대한 투수인가요?

    A. 이 질문은 지금도 야구 팬들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는 토론 주제입니다. 선동열은 통산 방어율 1.20이라는 믿기 힘든 수치를 가지고 있고, 최동원은 284이닝 소화 같은 압도적인 혹사 속에서도 리그를 지배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 더 위대한가보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한국 야구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최동원을 기록으로만 기억하는 분들도 많은데, 저는 그의 삶 전체를 놓고 보면 기록보다 선택이 더 인상적입니다. 리그 최고 연봉을 받는 선수가 침묵을 선택했다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선수협 앞줄에 서서 총대를 멨고, 그 대가로 죽을 때까지 감독 자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갈아 팀을 우승시키고, 다른 선수들을 위해 싸우다 쫓겨나고, 그래도 야구 현장을 떠나지 않은 삶. 제 경험상 그런 선택을 연속으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가장 존경받는 야구인으로 최동원이 꼽히는 이유는 기록 때문만이 아닐 겁니다. 경부선을 따라 이 도시 저 도시를 돌며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들을 묵묵히 해낸 사람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야구 인생이 궁금한 분이라면 2011년 영화 퍼펙트 게임부터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D0XBsf7nlfA